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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최은영/문학동네/2021

smsnow 2023. 1. 5. 22:01

 

'희령'으로 떠난 지연. 그곳에서 우연히 외할머니 영옥을 만나게 되고 영옥은 자신의 어머니를 똑 닮은 지연에게 옛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백정의 딸로 태어났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을 지녔던 증조모.

 

열입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증조모는 삼천에서 개성으로 도망치는 증조부를 살기 위해 따라갔고, 그곳에서 영옥을 낳았다. 다른 사람들의 차별과 폭력적인 처우에서 살아가던 증조모는 새비아주머니를 만났고 그녀와 연대할 수 있었다. 민족적 비극인 전쟁 속에 삼천은 대구로 피난길에 오르고 대구에서 다시 희령으로 가게 된다. 삼천의 삶에 삼천의 의지는 없다. 시대가 남편이 그렇게 살아내라고 요구할 뿐이다.

 

삼천의 딸이자 미선의 어머니이며 지연의 할머니 영옥. 영옥은 남편이 의도적으로 중혼을 했고 자신과 딸을 버리고 떠났음에도 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빼앗겼다는 아버지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딸 미선을 결혼시키면서도 딸 가진 게 죄인이라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새비아주머니의 딸 희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꿈도 가져보지 않은 채 살아온 자신에게 실망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갔다.

 

영옥의 딸 미선. 미선은 지연에게 상처를 주는 엄마다. 사위가 바람을 피워도 다른사람의 이목이 무서워 딸의 이혼을 반대하는 미선. 괜히 대들다가 두 대 세대 맞지 말고 한 대 맞고 끝내는게 낫다는 패배감에 젖어있는 미선. 지연의 언니 정연을 잃고 아예 세상에 없는 듯 정연을 지워버린 미선. 딸에게 늘 강해지라고 재촉하는 미선을 보며 지연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남편의 바람이 미선을 힘들게 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일까 미선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본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